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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없어도 복싱을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

병아리복서 2025. 12. 30. 15:46

잘하는 사람 말고, 남아 있는 사람의 이야기

복싱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은 “나는 재능이 없다”였다. 리듬은 느렸고, 반응은 항상 한 박자 늦었고, 미트를 치면 동작이 금방 흐트러졌다. 옆에서 같이 배우던 사람은 몇 주 만에 자연스럽게 움직였는데, 나는 여전히 가드 올리는 것부터 생각해야 했다. 그럴 때마다 괜히 주눅이 들었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복싱을 시작한 초반부터 그만둘 명분은 충분했다. 재미없고, 힘들고, 남들보다 못한다는 느낌까지 겹쳤다. 그런데도 복싱을 계속하게 된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재능이 없어도 할 수 있는 방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복싱은 재능보다 ‘버티는 힘’을 먼저 본다

많은 사람들이 복싱은 타고난 감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몇 달을 지켜보니, 처음에 잘하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먼저 사라졌다. 반대로, 늘 느리고 서툴던 사람들이 끝까지 남아 있었다.

나 역시 그 중 하나였다. 특별히 잘하는 건 없었지만, 수업에 빠지지 않고 나갔다. 잘 안 되는 날에도 그냥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체력이 따라오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야 동작이 조금씩 정리됐다. 복싱은 재능이 있으면 빠르게 늘고, 재능이 없어도 오래 하면 반드시 늘어나는 운동이었다.

잘하려다 망했던 경험

초반에는 괜히 잘해 보이고 싶었다. 힘을 더 주고, 빠르게 치려고 했다. 그 결과는 항상 같았다. 금방 지치고, 동작은 더 엉망이 됐다. 손목도 아프고, 숨은 가빠지고, 끝나고 나면 자책만 남았다.

한 번은 미트 치다가 너무 힘이 들어가서 손목을 살짝 다친 적도 있다. 그날 이후로 생각이 바뀌었다. “나는 원래 잘 못한다. 그러면 그냥 내 속도로 하자.” 이 마음가짐이 복싱을 계속하게 만든 전환점이었다.

재능 없는 사람에게 복싱이 더 맞는 순간

재능이 없다는 걸 인정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남들과 비교하지 않게 됐고, 오늘 할 수 있는 것만 하게 됐다. 이상하게도 그때부터 복싱이 덜 힘들어졌다.

어느 날은 미트를 치는데, 코치가 “오늘은 리듬 괜찮다”라고 말했다. 대단한 칭찬은 아니었지만, 그 한마디가 꽤 오래 남았다. 재능 있는 사람처럼 눈에 띄지는 않아도, 조금씩 쌓이는 변화는 분명히 있었다.

결국 남은 이유는 하나다

재능이 없어서 포기하는 건 쉽다. 나도 수없이 그렇게 해왔다. 그런데 복싱은 달랐다. 못해도 링에 서야 하고, 숨이 차도 끝까지 버텨야 한다. 그 과정에서 나는 결과보다 과정을 보는 법을 배웠다.

지금도 나는 잘하는 복서가 아니다. 하지만 예전의 나와 비교하면 분명히 다르다. 더 오래 버티고, 더 차분해졌고, 쉽게 포기하지 않게 됐다. 복싱을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거다. 재능이 없어도, 남아 있기만 하면 되는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복싱을 시작하려는 사람, 혹은 재능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말해주고 싶다. 잘하지 않아도 된다. 빨리 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오늘 한 번 더 가면 된다. 그걸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