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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싱을 오래 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

병아리복서 2026. 1. 2. 20:51

 

복싱을 시작하고 나서 꽤 오랫동안 나는 애매한 상태였다. 재미있다고 말하기엔 너무 힘들었고, 그렇다고 당장 그만둘 정도로 싫지는 않았다. 그냥 “운동이니까 한다”는 마음으로 다녔다. 솔직히 이 시기에 그만둔 사람들도 많았다. 나도 몇 번이나 마음이 흔들렸다.

그런데 지금까지 복싱을 이어오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는, 대단한 실력 향상이 아니라 아주 짧은 한순간의 감각이었다.

늘 똑같이 힘들던 미트 시간

초반 미트는 항상 고역이었다. 동작은 머리로 생각하고, 몸은 따로 움직이고, 숨은 금방 넘어갔다. 관장님이 콤비네이션을 불러주면 반 박자씩 늦었다. 미트 끝나고 나면 “오늘도 별로였다”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나도 그랬다. 미트를 치면서 ‘잘 친 기억’보다 ‘못한 기억’이 훨씬 많았다. 그래서 미트가 좋은 날보다, 끝났다는 사실이 더 반가운 날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생각이 사라진 순간이 왔다

결정적인 날은 정말 별거 없는 날이었다. 평소랑 똑같이 수업을 시작했고, 똑같이 줄넘기를 하고, 미트를 들었다. 그런데 미트를 치는 도중, 이상한 순간이 왔다.

콤비네이션이 머리에서 나오지 않고, 그냥 몸에서 나왔다. 잽을 치고, 스트레이트가 이어지고, 스텝이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졌다. “지금 뭐 하지?”라는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숨은 차는데, 괴롭지 않았다.

미트가 끝나고 관장님이 한마디 했다.
“방금 흐름 괜찮았어.”

그 말 한마디에 갑자기 심장이 뛰었다. 그날 집에 가는 길에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았다. 이게 바로 인정을 통한 도파민이 터지는 순간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실패가 있었기에 더 강했던 순간

물론 그 이후로도 잘 안 되는 날이 훨씬 많았다. 다시 엉망이 된 날도 있었고, “그날은 착각이었나?” 싶은 날도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한 번 느껴봤다는 사실이었다.

그 이후로 힘든 날이 와도 생각했다. “언젠가는 또 저 순간이 온다.” 이 믿음 하나로 복싱을 계속하게 됐다.

 


복싱을 오래 하게 만든 이유는 성취감이나 결과가 아니다. 딱 한 번이라도, 몸과 마음이 동시에 맞아떨어지는 순간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 짧은 도파민이, 수십 번의 힘든 날을 버티게 만들었다.

복싱을 시작하고 얼마 안 된 사람이라면 아직 이 순간을 못 느꼈을 수도 있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이 순간은 준비된 사람보다, 남아 있는 사람에게 온다.

그래서 지금도 복싱을 한다. 또다시 그 감각을 만나기 위해서. 그리고 언젠가, 또 아무 생각 없이 미트를 치다가 그 순간이 다시 찾아오길 기다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