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을 시작하기 전에는 중독이라는 말을 운동에 쓰는 게 과하다고 생각했다. 힘들면 그만두면 되는 거고, 재미없으면 안 하면 되는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복싱은 조금 달랐다. 분명 수업 중에는 “오늘이 마지막일지도”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집에 와서 샤워를 하고 나면 다음 수업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게 반복되다 보니 스스로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보다 먼저 반응하는 건 머리였다
복싱을 하면서 가장 신기했던 건, 몸이 아니라 머리가 먼저 반응한다는 점이었다. 수업이 없는 날에도 미트 치는 장면이 떠오르고, 줄넘기 리듬이 머릿속에서 반복됐다. 예전엔 운동이 끝나면 그걸로 끝이었는데, 복싱은 이상하게 잔상이 남았다.
나도 처음엔 이게 왜 그런지 몰랐다. 단순히 운동 강도가 세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됐다. 복싱은 집중이 강제되는 운동이라는 걸. 그 집중의 여운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도파민이 터지는 순간이 불규칙하다
복싱이 중독처럼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는, 보상이 예측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떤 날은 엉망이고, 어떤 날은 이유 없이 잘 된다. 나도 열 번 중 아홉 번은 “오늘도 별로네”라고 느끼지만, 딱 한 번 미트가 부드럽게 이어지는 날이 있다.
그 한 번이 너무 강렬하다. 잘해서라기보다, 생각 없이 몸이 움직이는 느낌이 온다. 이 순간을 한 번이라도 경험하면, 다음 수업에서 또 그걸 기대하게 된다. 이게 계속 사람을 복싱장으로 끌고 간다.
실패가 오히려 중독을 만든다
아이러니하게도 복싱은 실패가 많을수록 더 생각난다. 나도 잘 안 되는 날이 훨씬 많았다. 맞기도 하고, 리듬이 깨지고, 숨이 너무 빨리 찼다. 그럴 때마다 “다음엔 다르게 해봐야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복싱은 실패가 그냥 실패로 끝나지 않는다. 항상 ‘다음에 다시’가 남는다. 이 미완성 느낌이 머릿속에 계속 남는다. 그래서 쉬는 날에도 복싱 생각이 난다.
내가 빠졌다고 느꼈던 순간
어느 날은 수업이 끝나고 집에 오는데, 다리가 풀려서 계단을 내려가기 힘들 정도였다. 몸은 분명 한계였는데, 기분은 이상하게 좋았다. 그날 밤, 알람을 맞추면서 다음 수업 시간을 다시 확인했다. 그때 깨달았다. 아, 이거 좀 위험한데?
그 순간부터 복싱은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하루 리듬을 만드는 기준이 됐다. 힘들어도 안 가면 찝찝하고, 다녀오면 정리가 되는 느낌이었다.
복싱이 중독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명확하다.
집중이 강하고 보상이 불규칙하고 실패가 다음 행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지금도 복싱이 매번 즐겁지는 않다. 여전히 힘들고, 귀찮은 날도 많다. 그런데도 계속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복싱만큼 나를 현재에 붙잡아두는 운동을 아직 못 찾았기 때문이다.
아마 복싱을 해본 사람이라면 이 말에 공감할 거다. 힘든데, 이상하게 자꾸 생각난다. 그게 복싱이 중독처럼 느껴지는 진짜 이유다.